'2008년의 시간/긁음'에 해당되는 글 2건

  1. 사람으로 죽는다는 것 2008/05/08
  2. 미스터 스쿠프, 윤석봉 (1) 2008/05/07

My lost boy


Christine Lord, the mother of Andrew, who died of variant CJd, reveals how her son fought the illness with courage and dignity in this personal and moving account of his death and its impact on her family.

인간 광우병 (vCJD)으로 죽은 앤드류의 어머니 크리스틴 로드는  아들의 죽음과  죽음이 그녀의 가족에게 가져온 충격에 대하여 직접 감동적인 글에서 어떻게 그녀의 아들이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품위를 지키며 용기있게 병마와 싸웠는지 보여준다.  

A mother's story...

I was asked to write some words about Andrew and words are my profession. They usually fall seamlessly from my fingers to the keyboard.
앤드류에 대하여 무언가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글쓰는 것은 나의 직업이다. 대개 글을 쓰게 되면  내 손가락에서 단어들이 키보드로 끊임없이 솟아나온다.
But how does a mum write about her on-ly son who has died at just 24-years-of-age of vCJd?
그러나 하나뿐인 스물 네살된 아들을 인간광우병으로 잃은 엄마가 무엇을 어떻게 쓸수 있을까? 
From the age of four Andrew told me he wanted to work in television and radio, and he never wavered from that career path.
4살때부터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던 앤드류는 자신의 꿈을 한번도 바꾸지 않았었다.
At 14 he started spending every school holiday and weekend at Talk Radio in London.
14살때 앤드류는 방학과 주말마다 런던의 토크 라디오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He even sneaked up to work at the studios in Oxford Street when he should have been at school.
학교에 가야할 시간까지 옥스포드 스트리트에 있는 스튜디오에 일하러 몰래 다니기도 했었다.

Andrew, who had been shy and determined as a small boy, had blossomed into a teenager who was holding his own in the fast paced environment of a radio newsroom.
수줍지만 단호한 성격의 소년이었던 앤드류는 빠르게 움직이는 라디오 뉴스룸의 환경에 적응 하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He was offered work alongside some of the best professionals in the business
그는 방송계의 몇몇 최고의 프로들과 함께 일하는 자리를 얻게 되었다.

Fresh-faced talent

Fresh-faced and young, he was refused entrance to the Café de Paris during an outside broadcast.
새로 들어온 젊은 앤드류는 외부취재를 위해 카페 파리스 클럽에 들어가려다 (미성년자처럼 보여) 입장이 거부되기도 했었다.
It was on-ly when the founder of talkSPORT, Kelvin Mackenzie, intervened that Andrew was allowed to enter the club.
talkSPORT 창립자인 켈빈 맥켄지가 나서 겨우 클럽에 들어갈 있었다.
That night Andrew wore his first suit, which never quite fitted and always looked too big.
그날 앤드류는 그에게는 항상 너무 커보였던 그의 첫번째 양복을 입었다.
This is on-e of a thousand happy and joyful memories I have of Andrew. His light shone so brightly, if on-ly for a while.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앤드류에 관한 수없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들 하나이다.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의 재능은 정말 밝게 빛났다.
Producing shows for a long list of celebrities and making countless friends, Andrew's life was increasingly busy and fun.
많은 연예인들에 관한 쇼를 만들고 셀수 없이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가며 앤드류의 삶은 점점 즐겁고 바빠졌다.
He worked in Manchester, London and Birmingham, and there was always a new project, programme or show.그는 맨체스터와 런던, 버밍햄에서 일했고 항상 새로운 계획과 프로그램, 쇼가 함께 했다.
He began to branch out into television, working on quiz shows like Test the Nation, as well as working for CBBC, ITV and Sky.
앤드류는 텔리비젼까지 진출하게 되어 CBBC ITV, Sky에서 일했을뿐 아니라 "테스트 네이션" 같은 퀴즈쇼에서도 일하게 되었다.  
His capacity for work was huge and, because he loved his chosen career so much, it was never a chore.
그는 그가 선택한 직업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한번도 힘들어하거나 지겨워 하지 않았고 그의 일에 대한 능력은 대단했다.

Successful career lay ahead

Andrew was handsome, violet-eyed, designer-dressed and, like many young men, very fussy about his hair and appearance.
잘생긴 얼굴에 보랏빛 눈동자, 옷도 멋지게 입었던 앤드류는 다른 많은 젊은 남자애들처럼 머리 모양과 외모에 매우 신경쓰곤 했다.
By the aged of 20, he had already worked in the media for six years and this experience and professional maturity had already earned him the title "legend of the desk".
스무살 무렵, 그는 이미 6년동안이나 방송언론계에서 일했고 그의 이런 많은 경험은 그에게 "편집부의 전설"이라는 별명을 가져다 주었다.
On his 21st birthday Andrew said to me: "When I am head of the BBC I'll buy you a sports car mum".
그의 스물 한살 생일날 앤드류는 내게 말했다. " 엄마, 내가 BBC 사장이 되면 엄마에게 스포츠카를 사줄께."
Although I laughed, I believed my son had a very successful career and life ahead of him.
비록 당시에는 웃어 넘겼지만, 나는 아들이 앞으로 성공적인 직업과 삶을 가지리라 믿었었다.
So when Andrew started to work less, spend more time alone in his room and withdraw from family life, I was concerned.
그래서, 언젠가부터 앤드류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방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을때 나는 걱정스러웠다.
The headaches, monosyllabic conversations and dramatic weight loss led to many trips to the GP, who diagnosed depression.
두통, 한마디의 짧고 퉁명스러운 대화 그리고 엄청난 체중 감소로 병원을 향하게 되었고, 의사는 우울증이라고 진단했다.

Withdrawn and sad...

By March 2007 Andrew could no longer work and he couldn't deal with correspondence or phone calls.
2007 3월경이 되자 앤드류는 이상 일할수 없게 되었고 전화등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수 없게 되었다. Everything just seemed too much for him.
모든 것이 그에게는 너무 힘겨워 보였다.
Andrew was not on-ly withdrawing from me, he seemed to be distancing himself from the world.
엄마인 나만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모든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The deadly disease that had been incubating in his body for many years was developing.
오랫동안 그의 몸속에서 배양되고 있던 죽음의 병이 자라나고 있었다.
Andrew was not depressed… he was dying.
앤드류는 우울증이 아니었다...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The year 2007 is a blur of hospitals, tests and invasive procedures.
2007 한해는 병원과 검사 그리고 외과적 처치들로 얼룩져있다.
Lumbar punctures, tonsil biopsy, brain scans, blood tests.
요추천자, 편도 생검, 뇌스캔, 피검사.
The weeks of uncertainty were followed by the dreadful diagnosis.
몇주 동안의 결과를 알수 없는 불안감은 결국 끔직한 검사 결과로 마무리지어졌다.
Then there were the long months of holding his hand through the days and nights of terror, which is the reality of dying from vCJD.
때부터 기나긴 동안 앤드류의 손을 잡고 인간광우병으로 죽게 된다는 현실에 대한 공포의 밤과 낮을 보내게 되었다.

 

I put on my most reassuring smile until it became fixed, although it hid a deep sadness.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뒤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있었다.

Breaking my heart

Andrew's debilitating symptoms grew hour by hour, each ticking of the clock producing another disablement, another torture, pain or fear.
앤드류의 증상은 시계 바늘이 움직일때마다 새로운 마비 증상과 고통, 아픔, 공포를 자아내여 매시간 악화되었다. When he had to use a plastic drinking beaker for the first time, as he couldn't co-ordinate his hands, Andrew told me: "Mum I will on-ly use this in the house and until I'm better".
손을 움직일수 없게 되어 처음으로 플라스틱 음료 비이커를 사용해야만 하게 되었을때 앤드류는 내게 말했다 : "엄마, 이거 나을때까지 집에서만 사용할래요."
I smiled and agreed, but inside my heart was breaking.
나는 미소를 보이며 그러라고 했지만, 가슴 속은 찢어지고 있었다.
Andrew was as determined as ever.
앤드류는 언제나처럼 굳은 의지를 보여줬다.
He would say: "I must be able to walk", until he couldn't take a single step.
걸음도 없게 될때까지 앤드류는 말하곤 했다 : "나는 걸을 있어."
Then he would say: "I must be able to go out to do simple things like watching and hearing the sea", until he was unable to go outside.
그후  밖에 전혀 나갈 없게 될때까지 그는 말했다 : "밖에 나가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다를 바라보는 일정도는 분명히 있게 될거야." 
And finally: "I must be able to talk", until he could no longer put a word together, or even move the muscles in his face.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어 마디 말할 없게 될때까지, 아니 얼굴의 근육조차 움직일 없게 될때까지 : " 있어."

Upbeat and unafraid...

I filled our home with his friends, music, activity and noise, pretending to be upbeat and unafraid.
즐거운척 두려워 보이지 않기 위해 앤드류의 친구들을 집에 부르고, 음악과 놀이, 왁자지껄한 풍경으로 집안을 채웠다.
Andrew looked to me for reassurance to allay his fears. He trusted me and I hope I didn't let him down.
앤드류는 내가 그의 공포를 가라앉혀주기를  바랬다. 그는 나를 믿었고 나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When he woke in the morning, I was the first person he saw. And I was the last person he looked at before he closed his eyes at night.
앤드류가 아침에 깨면 제일 먼저 나를 있었고, 밤에 눈을 감기전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도 나였다.
While Andrew slept, I would sit in a chair next to him reading research, scientific data and the many volumes of the BSE inquiry, looking for answers to my many questions.

앤드류가 자는 동안 나는 옆의 의자에 앉아 광우병에 대한 나의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 리서치 자료들과 과학 자료들, 그리고 많은 양의 광우병 연구서들을 읽었다.

 

This resulted in the Inside Out programme and my campaign for justice for Andrew.

"인사이드 아웃" 프로그램과 앤드류를 위한 정의 캠페인이 바로 결과물이다.

 

My fury at watching my gentle son die so terribly has increased my tenacity and it drives me forward through the most difficult time of my life.

착한 아들이 공포스럽게 죽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던 나의 분노는 나를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내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며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Distressing fight for life

Andrew had a terrible, noisy and distressing death.

앤드류는 끔찍하고 소란스럽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For four days and nights, I held my son as he fought to stay alive.

4 낮과 밤동안 아들이 살기위해 싸울때 나는 그를 안고 있었다.

 

Although Andrew's brain had been systematically destroyed by vCJD, his 24-year-old body refused to give up.

비록 앤드류의 뇌는 인간광우병에 의해 조직적으로 망가졌지만, 그의 24년된 육체는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His heart was strong.

그의 심장은 강했다.

 

I held him as his body continually shook the iron bed that had become his home.

앤드류가 온몸으로 그의 집이 되어버린 철제 침대를 뒤흔드는 동안 나는 그를 안고 있었다.

 

Despite the morphine, his rattling breaths filled my bedroom. Those last images of my Andrew are burned on my soul and broken heart.

모르핀 주사도 소용없이 거르렁거리며 거칠게 내뱉던 그의 숨소리가 침실을 채워버렸다. 나의 앤드류의 마직막 모습들이 나의 영혼과 심장에 불타고 있다.

 

I believe that many people are responsible for my son's avoidable death and that none of them have been held accountable.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들의 피할수 있었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Please join me in my campaign for justice for Andy.

앤디를 위한 나의 정의 켐페인에 참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last updated: 03/05/2008 at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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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에서 빛난 ‘미스터 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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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기사입력 2008.03.16 14:01 | 최종수정 2008.03.16 14:01

[한겨레] "당신의 사진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로버트 카파가 남긴 이 말은 피사체를 향한 집중과 몰입이 사진가의 덕목임을 말해준다. 한국 사진계에서 윤석봉(67)의 사진이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진가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동아투위 해직이 전화위복으로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한평생을 사진기자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1967년 < 동아일보 > 사진기자로 출발해 75년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됐고, 86년 < 로이터 > 한국 특파원으로 복귀해 200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30년 이상 카메라를 놓지 않고 현장에서 지냈다. 강한 현장성은 기교가 적으면서도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인물들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행동에 몰입했고,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려운 장면을 포착했다.

윤석봉은 "동아투위 사건을 겪지 않고 한국 신문사에 남았다면 사진부 데스크로서 현장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화위복이 됐다"고 말했다. 흔히 국내 언론사에서 사진기자 15년 안팎을 하면 사진 에디터 기능을 하는 데스크를 맡는다. 하지만 < 로이터 > 에서 사진 인생을 바친 그는 예순이 넘어서까지 현장을 뛰어다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진엔 한국 현대사 거개가 담겼다. 69년 홀몸으로 뛰어들어 취재한 흑산도 무장간첩 사건부터 87년 6월 항쟁, 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 2004년 고속철도(KTX) 개통까지 없는 게 없다. 또한 그는 청와대 출입기자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다섯 대통령을 기록했다. 그리고 취재하고 돌아올 때마다 '물건'을 가져오는 그를 < 로이터 > 는 '미스터 스쿠프'(scoop·특종)라고 불렀다. < 로이터 > 는 수차례 그의 특종기를 전 세계 사진기자들에게 팩스로 돌렸다. 윤석봉이 연달아 특종 사진을 건진 이유는 로버트 카파가 그랬던 것처럼 피사체에 몰입하고 집중했기 때문이다. 현장에 포진함으로써 그는 스쿠프를 건질 수 있었다.

그의 스쿠프는 87년 6월 항쟁에서 빛난다. 경찰의 방패에 가격당하는 학생, 최루탄 발사기를 빼앗아 부수는 마스크 쓴 시민, 화염병을 던지는 청년의 분노 어린 표정 등 그는 시위대와 전경 속에 섞여 뛰어다녔다.

"사진을 찍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위험한 순간에 시위대 한복판에 서 있다."

셀 수 없는 화염병이 그의 발밑에서 불탔고, 경찰에게도 부지기수로 맞았다. 지금도 그의 종아리는 화상의 흉터로 어지럽다.

"연세대 앞 철길 둑에 올라 시위 전경을 찍었다. 학생들이 기자들에게 돌을 던졌다. 군부독재에 제 소리를 못 내던 언론에 대한 항의였다. 나는 돌세례를 받으며 시위대 앞으로 내려갔고 당신들의 말을 세계로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설명했다."

잊을 수 없는 이한열과 그 가족

그 뒤, 학생들은 화염병을 들고 뛰던 시위대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앉아 있던 윤석봉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군부독재에 재갈 물린 한국 언론과 달리 외국 통신사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윤석봉에게는 아침부터 방독면과 헬멧을 쓰고 나가 한밤에 돌아오는 고된 나날이 계속됐다. 몸무게가 8㎏ 줄었다. 하지만 항쟁을 기록한 사진은 매일 세계로 타전됐다.

윤석봉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87년 6월9일 최루탄에 스러진 이한열 열사와 가족들을 담은 스쿠프를 꼽는다. 한 달 동안의 투병 끝에 숨진 이한열 열사는 수의를 입고 누워 눈을 감았다. 6·29 선언을 앞세워 군사독재는 항복했고, 가족들은 승리를 보지 못하고 떠난 이한열 열사를 고개 숙여 바라보고 있다. 숨진 이한열 열사가 전경으로, 가족들이 후경으로 배치됐다. 사진가와 피사체의 거리는 제로에 가깝다. 가족들이 윤석봉에게만 허락한 '단독'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윤석봉의 사진 인생을 결산한 사진집 < 미스터 스쿠프 > (눈빛 펴냄)를 보면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지나간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 단 하나가 빠졌다.

"광주항쟁을 빠뜨린 게 아쉽다. 난 당시 해직기자였기 때문에 광주에 내려가지 못했다. 사진기자로서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광주시민들에게 미안했다. < 로이터 > 사진기자로 복귀한 뒤, 매년 5월 광주를 찾았다."

기교 없이 담백한 그의 사진은 메시지가 분명하다. 사진가는 피사체 가장 가까이에 존재했으며, 짧은 거리성은 세밀화를 그려냈다. 단순한 기록매체임에도 사진이 정치적인 매체로 전화하는 이유다. 현장은 메시지를 창조한다.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작품사진 윤석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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